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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추론이 사실과 다른 이유를 깨달을 때 비로소 지식은 의미를 갖고 체화된다. 대학이 논술에서 요구하는 건 무엇보다 스스로 질문을 구성하는 능력이다.
정답이 없는 논술은 학생들을 골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아직 세상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고 고백한다. 학문은 진리이고 전문가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환상이 학생들의 생각을 틀어막고 있다. 학생 스스로의 생각을 퍼올리기 전에 생각을 틀어막고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주는 게 순서다.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만 연속되면 원인과 결과로 연결하고픈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통념을 극복하려면 이런 인과론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 어떤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한다면 일단 부정하고 시작하라.
생방송을 보며 진실을 생생히 보고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기자들의 부도덕보다 더 치명적인 이 시대의 타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반사회적 범죄보다도 유승준을 매몰차게 대한다. 왜일까? 놀랍게도 그가 한 행동이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법을 어기지 않는 방법으로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도덕이나 사회적인 매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그에게 보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유승준과 같이 합법적으로 군대를 회피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복해야 하는 것일까?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말이다.
확실하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의 선택에 대한 상대편의 예측까지 추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는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로의 정체나 주식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게임에서와 같이 상대방의 선택을 알아야 내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개인들의 선택이 전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결국 개인에게 다시 어떤 결과를 안겨주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이론이 바로 게임이론이다.
문제는 복잡한 존재인 인간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기업가가 종업원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업의 문화가 바뀐다.
한 번 정도 유승준의 선택을 인격의 귀결이 아닌 합리성의 과실로 보자. 만약 그의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그런 선택은 도덕적 제방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도 동시에 인정하는 셈이다. 국적 선택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 전적으로 군대 몇 년 때문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군대 몇 년이 그토록 치명적인 손실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 치명적 손실을 결정적 기회로 만들어줄 방법은 없는가? 한국의 젊은이를 사랑하는 사람, 젊은이들의 고민에 진지하게 동참하는 이라면 한 연예인을 악마로 낙인찍어 돌 던지고 냉소하는 그 시간에 군대가 기회가 되는 방법을 강구해 볼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이기도 하다.
개인의 권리는 ‘정의’나 ‘진실’보다 우선하고 어떤 경우라도 국가는 이를 훼손할 수 없다는 신념은 자유주의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키기에는 지불해야 할 비용이 많이 드는 가치인 것이다.
산업은 끊임없이 변한다. 이 사실을 피할 수 없는 전제로 받아들이면 실업에 대한 시각도 바뀐다. 반드시 막아야 할 낭비요 사회악에서 사회변화를 가능케 하는 완충지대이자 잠재력의 보고로 볼 수도 있다. 더구나 억지로 실업률 제로를 실현하는 사회는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느라고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의 가장 처음은 직업선택과 직업변경이라는 개인의 자유일 수밖에 없다.
유기체는 환경의 변화에 빠르게 변화함으로써 적응한다.